영화용 필름의 현상, ECN-2 프로세스
지금에야 디지털 기술이 발전해서 많은 영화들을 디지털로 촬영합니다만, 오랜동안 영화는 필름으로 촬영돼 왔습니다. 물론 아직도 영화를 필름으로 촬영하는 걸 고집하는 유명한 감독들이 있고 그런 흐름이 세계 영화계에 남아 있어서 계속해서 필름으로 촬영하는 영화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필름으로 영화를 촬영하려면 여러 불편함과 제약이 있고, 프로세스가 번거롭고 어려우며 무엇보다도 디지털 촬영에 비해 많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필름으로 촬영하려는 건 필름으로 촬영한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겠죠.
후지필름은 영화촬영용 필름의 생산을 중단한 지 꽤 되었고, 현재 생산되는 영화촬영용 필름은 코닥에서만 나오는데 8mm와 16mm용, 35mm, 그리고 70mm가 나오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극장에서 상영하는 대부분의 장편 영화들은 35mm 필름으로 촬영됩니다. 70mm는 아이맥스 촬영용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mm는 필름의 폭을 의미하는데, 보통 사진을 찍는 필름이 35mm이며 이 필름은 외관상 기능상으로 똑같아서 잘라서 사진촬영용 파트로네에 감아 넣으면 보통의 필름카메라에서도 영화가 아닌 스틸 사진 촬영용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현상이겠죠.
영화촬영용 필름에는 컬러필름과 흑백필름이 있으며 영화를 만들고 가공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중간과정용, 그리고 릴리즈용(극장에서 상영하는 데 필요한) 등 여러 버전이 있습니다만, 촬영을 위해서는 촬영용 필름을 사용하게 됩니다. 코닥에서는 비젼 시리즈, 후지에서는 이터나, 리얼라 등의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코닥에서 현재도 생산하고 있는 영화용 필름은 Vision3 50D, 200T, 250D, 500T가 있으며 35mm의 경우는 400ft(약 120미터)의 큰 캔(위의 사진)의 형태로 판매됩니다. 사진촬영용 36컷짜리 필름의 길이가 대개 1.5미터 정도이므로 약 80롤 정도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습니다. 후지의 필름들은 생산하지 않은지 오래 됐기때문에 지금 구할 수 있는 것들은 어떻게 보관되었든 예외없이 유통기한을 한참 지난 것들입니다. 특이하게 영화용 필름들은 어디에도 유통기한이 적혀 있지 않은데, 일반 소매유통이 되지 않았고, 가장 좋은 영화 품질을 위해서는 오래도록 두었다 사용하지 않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외없이 언제 생산되고 판매된 것인지, 어떤 정도의 상태인지를 촬영하고 현상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기도 합니다.
사진촬영용 필름들이 많이 단종되고 사라지면서 영화를 촬영하는 데에만 사용되었던 필름들이 이렇게 리스풀링(re-spooling, 사용된 빈 파트로네에 다시 감아넣기)의 형태로 만들어져 사용되거나, 혹은 재판매하는 셀러들이 많아졌습니다. 문제는 이미 얘기한 것처럼 필름의 상태가 어떤지 촬영하고 현상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찾아보면 이베이나 일부의 해외사이트들, 국내외 필름샵들, 사진관들, 중고장터들, 사진동호회들 혹은 심지어 개인들에게서까지 이런 필름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 감은 것들도 있고 외국에서 감아서 이쁘게(?) 디자인된 스티커를 붙인 리패키징 필름을 아예 수입해서 판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외관에 아무리 이쁘게 멋지게 혹은 우락부락하게 붙이고 포장했다고 하더라도 내용물은 동일합니다. 어떤 컨디션의 필름을 감아넣었는가가 중요할 뿐입니다.
50D나 250D는 촬영감도가 각각 50과 250인 필름입니다. D는 Daylight, 햇빛(주광)에서 촬영해야 제 색상이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200T와 500T는 각각 감도가 200, 500이며 T는 텅스텐(백열등) 조명에서 촬영해야 제 색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영화촬영을 위해서는 반드시 조명이 필요했기때문에 D와 T의 두 가지로 나옵니다.
영화용 필름의 현상은 ECN-2라는 프로세스로 이루어집니다. 통상 영화용 필름은 영화필름 현상소에서 대규모/다량으로 처리되었고 일반적인 사진관이나 현상소에서는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한 씬은 몇 초에서 몇십 초 혹은 몇 분이나 이어지고 그러기 위해서는 24컷 36컷과 같은 짧은 길이가 아닌 수십 혹은 수백 피트 길이의 롱 롤(long roll) 그대로를 현상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영화용 필름에는 일반 사진촬영용 필름에는 없는 렘젯(remjet)이라는 특수 코팅이 입혀져 있습니다. 렘젯은 보통 검은 색의 카본(탄소)층인데, 필름에서 발생하는 정전기를 제거하고, 고속으로 이송될 때의 스크래치로부터 필름을 보호하고, 검은 색이어서 재귀반사(할레이션)를 방지하는 역할까지 하지만 현상과정에서 제거돼야만 합니다. 그래서 ECN-2 현상프로세스에는 이 렘젯을 제거하는 과정이 있고, 일반 사진관이나 현상소에서 보통의 사진촬영용 필름들과 같이 작업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를 무시하고 사진관에서 사용하는 현상기에 넣었다간 약품도 오염되고 롤러나 드라이 유닛 등이 심하게 오염되어 큰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렘젯층을 미리 제거한 다음 패키징해서 판매하는 필름이 바로 씨네스틸입니다. 보통의 사진용 필름처럼 촬영하고 아무 사진현상소에서나 현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둔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ECN-2가 아닌 C-41로 현상하기 때문에 색상이 좀 달라지게 됩니다. 이 부분은 아래에서 더 설명하죠.
ECN-2 프로세스는 소규모(한 롤에 1.5미터의 길이)의 사진용 필름을 현상하는 현상소를 위한 것이 아니기때문에 대규모, 대량처리를 위해 개발되어 있습니다. 또 스크린 영사용 포지티브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되는 원본 소스로 활용되어야 하기때문에 필름 자체가 담아내는 이미지의 관용도도 사진용 필름보다 넓은 편입니다. 영화는 종이사진이 아니어서 필름 자체로 편집하고 보정하고 복사되어 상영용 필름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특성은 스캔하거나 인화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드러납니다. C-41에 비해 약품 조성도 완전히 다르고, 시간도 다르다거나, 현상과정의 온도도 한참 높다거나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E6로 현상해야 하는 슬라이드필름을 C-41로 현상하는 것을 크로스현상이라고 합니다. 크로스(cross, 교차)현상이란 E6를 C41로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어떤 필름을 다른 프로세스로 작업하는 모든 것들을 다 의미합니다. 흑백필름을 C41이나 E6로 현상해보는 것도 크로스 현상이지만 필름의 구조와 특성상 그렇게 했다간 아무 상이 나오지 않으니 하지 않는 것이고, 의미있는 결과물을 얻기에 슬라이드필름을 C41로 현상했을 때 결과가 좋으니 주로 그 작업이 대부분이어서 그것을 크로스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ECN-2로 현상되어야 하는 영화용 필름을 C41로 현상하는 것도 일종의 크로스 현상입니다.
영화용 필름을 C41로 크로스현상하고자 해도 렘젯은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영화용필름을 현상해주는 국내의 모든 현상소들은 이런 과정을 작업합니다. 다만 이후의 과정을 C41로 하느냐, ECN2로 하느냐의 차이가 있는데, C41로 하는 이유는 ECN2 약품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미 2013년에 국내의 모든 영화용 필름 현상소가 문을 닫았고 더는 코닥에서 그 약품을 유통하지 않습니다. 대안으로는 외국의 필름/약품 유통업체에서 ECN2 킷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으며 이를 소량 혹은 대량으로 구매하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영화용 필름을 촬영해서 C41로 현상하고 스캔했을 때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은 컬러 밸런스가 틀어진다는 점입니다. 현상소에 스캔까지 의뢰했다면 보통의 컬러 필름들과 다른, 매우 틀어진 듯한 컬러들을 경험하신 적이 있을테고, 직접 스캔해보셨다면 색잡기가 아주 까다로왔던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현상소에서 작업할 때에도 이렇게 틀어진 색상을 잡아줘야 하기 때문에 보통의 C41 컬러필름으로 촬영한 것과 같은 완벽한 밸런스의 색상을 만들기가 무척 까다롭습니다. 심지어 한 컷 한 컷 다르기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틀어진 색상은 또 한편 인위적으로 보정해서 만들어내기 어렵기 때문에 어떤 분들은 좋아하시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극장에서 보는 영화이 그런 식으로 이상하게 틀어진 컬러들로 가득했던 경험은 없으시겠죠.
ECN-2로 현상하면 그런 일이 줄어듭니다. 특히 싱싱하고 좋은 컨디션의 필름으로 촬영하고 현상하면 놀랄만큼 좋은 밸런스와 발색을 보여줍니다. 극장의 스크린에서 보던 그 색상이 나옵니다. 다만 T(텅스텐) 필름은 텅스텐 조명(카페 등의 할로겐과 같은 노란 색 조명)에서 촬영해야 밸런스 잡힌 색상이 나오고, 주광에서 촬영하면 특유의 푸르스름함이 나타납니다. 다만, 유통되는 영화용 필름들의 컨디션이 천차만별이어서 완벽한 색상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후지의 영화용들은 이미 단종된 지 십 년 이상인 것들도 있어서 더한 경우가 많습니다.
오래된 영화용 필름들은 원래의 표기감도보다 노출을 더 주어 촬영하고 정상(노멀)로 현상하는 게 나은 결과물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필름09에서 구입한 영화용 필름들인 50D와 200T를 이용해서 촬영하고 ECN-2로 현상한 다음 스캔해서 약간의 조정을 거친 샘플컷들 몇 개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Kodak Vision3 50D
Kodak Vision3 200T
(살짝 광고: 포토마루에서는 영화용 필름을 ECN-2 프로세스로 현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