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2017. 11. 11. 18:36

'노출계가 없는 디지털카메라' 같은 게 가능할까요?


기계적으로야 가능하겠지만 시장적으로는 불가능하겠죠. '흑백으로만 찍히는 디지털 카메라'가 시장에 나온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게 얼마나 팔리겠나 싶었지만 워낙 많이 안 팔아도 되는 메이커가 비싸게 팔았기에 그래도 꽤 많은 분들이 쓰시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흑백만 찍히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메커니즘을 이용했기에 컬러로 찍어서 흑백으로 만드는 것보다 몇몇 부분에서 더 좋다, 라고 광고했고 그게 어느 정도는 먹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흑백전용 디지털카메라, 라이카 M-Monochrome 

소개기사: http://it.chosun.com/news/article.html?no=2346541&sec_no=


옛날 아주 오래전 필름카메라 시절에는 카메라에 노출계가 없었습니다. 마땅한 사진을 만들기 위해 필름에 노광될 적절한 빛의 양의 측정할 수 있는 장치가 노출계죠. 그렇게 하는 걸 측광이라고 합니다. 폰을 들고 카메라 앱을 돌려서 화면으로 보다가 터치하면 사진이 찍히는데, 이 과정에도 그런 장치들이 다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옛날에는 사진을 찍는다는 게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카메라도 비쌌고, 사진술은 어려운 기술이었죠.


노출계가 없는 카메라는 이 빛의 양을 측정하는 계기가 없는 겁니다. 렌즈의 조리개와 셔터속도만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있죠. 노출은 따로 외장 노출계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어쨌든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이 판단합니다. 사진을 많이 찍고 훈련해보면 상황이나 빛, 시간대 등 여러 감각에 의해 '이 정도면 적정할 거야'라는 판단이 가능한데, 이걸 흔히들 '뇌출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놀랍긴 하지만 현재도 노출계가 없는 필름카메라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일회용카메라나 토이카메라 같은 단순한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것들이고, 라이카 같은 메이커에서는 전기적 메커니즘을 전혀 배제하고 순수한 기계식으로만 만든 M-A 같은 매우 비싼 카메라를 팔고 있기도 합니다.


노출계가 없는 순 기계식 필름카메라, 라이카 M-A


노출계가 없으면 사진이 어떻게 찍힐지 사람이 판단해야 합니다. 조리개나 셔터속도, 필름의 감도에 따라 주관적으로 빛을 느끼고 그 빛의 세기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고도의 훈련까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경험과 감각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더더욱 필요한 건 상상력입니다. '이 정도로 이렇게 찍으면 아마도 사진이 이렇게 나올 거야.'라는 이미지에 대한 상상은 마치 소설을 읽으며 영화보다도 더 선명한 장면을 떠올리게 되는,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


노출계가 있다면 인간은 무조건 기계에 의존하게 되어 있거든요.


노출계가 없는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 뒤에 달린 액정으로 방금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고 아, 마음에 안 드네 다시 찍어야지, 하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게 될 겁니다.


그런 면에서 라이카라는 메이커는 실험적 제품을 시장에 실제로 출시하는 꽤 의미있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뒤에 액정모니터가 달려 있지 않은 디지털카메라를 말이죠. 다 찍고 집에 와서 컴퓨터에 꺼내놓아야만 사진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카메라. 조금은 상상력을 자극할 수는 있겠지만, 시장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많이 팔리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할테니까요.


노출계가 없는 디지털카메라이려면 그래서, 액정모니터도 없어야 할 겁니다. 노출계도 없고 액정도 없고, 찍고 나서 집에 와서 꺼내보아야만 하는 디지털카메라.


뇌출계로 자유자재로 사진을 찍는 분들이라면 혹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 노출에 실패해도 RAW 가공으로 다 살려낼 수 있는 게 요즘의 디지털 기술이니까요. 아마 사진 인구의 0.001퍼센트는 되지 않을까요? (라이카라면 진짜 만들어서 시장에 내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척 비싼 값에..)



Posted by 이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