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흑백필름으로 사진을 찍어 현상소에 현상과 스캔까지 의뢰하시는 분들 중 그 현상소가 후지필름의 기종을 사용하는 곳일 경우 자주 볼 수 있는 사진들의 경향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FDI라고 하는 간판을 달고 영업하고 있는 곳들이 대부분 후지필름의 기종을 사용하고 있는데, 국내에 들어온 대부분의 후지 기종들은 한국후지필름을 통해 공급된 것들입니다. 업소는 기계를 들여놓는 것만으로 운영하기는 어렵습니다. 설치도 해야 하고 교육도 받아야 하고 유지보수도 받아야 하고 특히나 인화지나 약품같은 자재들을 지속적으로 공급받고 거래해야 하기때문에 고정 거래를 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후지와 노리츠로 양분되는 국내 미니랩 장비들 중에서 보다 유리해보이는 조건과 사후관리를 제공하는 곳을 선택해야만 했었죠. 그래서 후지를 선택하면 FDI(Fujifilm Digital Imaging)라는 간판을 달 수 있었고 후지에서 장비를 도입할 수 있었던 겁니다.
후지필름의 프론티어 미니랩 장비에 같이 보급된 필름스캐너들은 몇 가지 기종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최신(?)의 기종은 SP-3000 입니다. 이 기종은 135필름 및 120/220 등 중형 필름까지를 스캔할 수 있습니다. 135는 자동이지만 중형용은 일일이 한 컷씩 수동으로 작업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거꾸로 더욱 다양한 필름 판형들을 편법적으로 작업할 수도 있습니다. 이외에는 조금 구형인 SP-2000과 국내에는 거의 보급되지 않은 SP-2500같은 기종들도 있고, 135 전용으로 보급된 SP-500이나 SLP-800, SLP-1000과 같은 기종들도 더러 있습니다.
기종에 따라 작동하는 방식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다들 같은 이미지 프로세싱 알고리즘을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지의 특성이나 품질은 거의 비슷합니다. 스캔 속도라든가 Dmax와 같은 기술적 스펙은 텍스트로 공개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냥 시간당 몇 코마(몇 컷을 스캔해낸다)를 작업한다 정도의 스펙이 카탈로그에 공개돼 있을 뿐입니다.
일부에서는 'FDI에 맡기면 모든 필름이 다 FDI가 되어버린다'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후지의 스캐너가 그런 정도로 막장까지는 아닌데, 스캐너의 설정이라든가 혹은 장비를 운용하는 작업자(오퍼레이터)가 필름마다의 특성을 잘 살려내는 작업을 못한다거나(혹은 하지 않거나-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니까요) 하는 등의 이유로 '막스캔'된 결과물이 고객에게 그대로 제공되다 보면 일어나는 일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이 후지필름의 스캐너는 흑백필름을 스캔할 때 결과물이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스캐너들은 그렇지 않은데 후지의 기종들은 특히나 원래는 '함께 시스템으로 붙어 있는 은염 레이저 인화장비'에 최적화된 결과물을 만들어내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이 스캐너들은 원래는 인화기와 한 덩어리로 되어 있고 따로 떨어뜨려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별도의 장비를 만들어 따로 떨어뜨려놓고 사용하게 개선이 되었습니다만. 그래서, 컬러필름은 물론이고 흑백필름도 레이저로 노광해서 약품처리되어 나오는 은염인화를 위한 중간결과물로서의 디지털 데이터를 뽑아내도록 되어 있던 것이죠.
컬러인화지로 흑백의 결과물을 작업하는 것을 크로모제닉(chromogenic) 인화라고 하는데요, 인터넷 인화사이트 같은 곳에 흑백 이미지를 보내 뽑아보신 분들은 어떤 경험들이 있으실 겁니다. 말하자면 완벽한 흑백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인데요, 이것이 바로 크로모제닉의 특성입니다.
어떤 경우는 불그레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푸르스름하기도 했을 겁니다. 컬러 캘리브레이션이 잘 잡힌 인화의 경우는 좀 덜하기는 한데, 그래도 형광등이나 실내등, 혹은 주광 등에 따라 붉게도 푸르게도 보이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바로 컬러인화용 인화지로 흑백사진을 뽑았을 때 나타나는 특성입니다. 후지는 이런 점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흑백의 이미지를 컬러인화지에 인화하면 오히려 잡색이 돌게 된다는 점을 보완하려고 했죠.
실제로 순수한 그레이스케일을 크로모제닉으로 인화해보면 밝은 부분쪽은 약간 붉은 빛(마젠타)이 돌고 어두운 부분쪽은 푸른 빛(그린)이 돌게 됩니다. 그래서 후지는 흑백필름을 인화하려고 스캐너에 넣으면 그 인화용 데이터는 그 반대의 성향(암부는 마젠타, 명부는 그린)이 되도록 설계해놓았습니다.
그래서 후지의 스캐너로 스캔된 흑백필름의 이미지들은 흑백이 아니고 불그레 푸르레한 톤이 도는 컬러의 결과물이 되는 것이죠.
전형적인 샘플 하나를 보시죠.
흑백이지만 암부쪽으로는 붉은 기운이 느껴지실 겁니다. 잘 모르시겠다구요? 아래의 사진을 보시죠. 같은 사진을 완전히 그레이스케일로 변환한 것입니다. 화면을 위아래로 스크롤해서 비교해보세요.
확연히 비교가 되시지요?
이렇게 붉고 푸른 톤을 넣은 흑백 스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데, 현상소에서는 이런 특성을 알거나 혹은 모르거나(모르는 곳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합니다. 어떤 곳들은 완전한 흑백으로 만들어서 제공하기도 하고, 어떤 곳들은 그대로 제공하기도 하죠.
아무튼 화면에서 잡색이 도는 주로 불그레한 이미지들은 이것이 보통 흑백사진에서 많이들 일부러 작업하는 세피아 톤(부드럽고 미묘한 갈색톤을 일부러 넣은) 것과는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가끔씩은 거슬리곤 합니다. 이 톤들은 좋은 흑백을 위해서가 아니라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크로모제닉 인화시의 잡색 보정용으로 들어간 미세한 톤들일 뿐이거든요.
만일 필름을 맡긴 현상소에서 받은 이미지가 완전한 흑백이 아닌 불그레 푸르레한 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이미지라면 웬만하면 완전한 흑백으로 변환해서 사용하시기를 추천해드립니다. 요즘은 잉크프린터같은 것들도 좋아져서 흑백이미지를 꽤 잘 인쇄해내는데, 그런 곳에 이 크로모제닉 보정톤이 들어간 불그레 푸르레 이미지를 사용하면 그 색들도 그대로 나오게 됩니다. 오히려 잡색이 끼게 되는 것이죠.
몇 장 더 보여드리겠습니다. 위는 보정톤이 들어간 사진들, 아래는 그레이스케일들입니다.
완전히 흑백으로 만드는 방법은 그레이스케일로 변환, desaturate 등이 있습니다. 컬러필름을 스캔한 이미지나 컬러로 촬영된 디지털 이미지를 흑백으로 변환하려고 색을 뺄 때와 같은 심심한 톤이 되지는 않습니다. 원래의 흑백필름을 스캔한 이미지이거든요. 잡색만 빼는 작업이 됩니다. 물론 포토웍스나 포토스케이프와 같은 편리한 프로그램을 사용하셔도 전혀 무리가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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