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다음블로그에 써두었던 글입니다. 2008년쯤 작성된 글이라 과거시점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제 2017년이니 내용들을 조금은 손보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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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십 년 전,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의 만화가들이 그려내는 '미래의 생활상' 같은 컷을 보면, 벽에 걸어놓고 보는 얇은 벽걸이 TV라든가, 얼굴을 보며 전화하는 화상전화라든가, 아침마다 자동으로 인쇄되어 나오는 신문이라든가... 하는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벽걸이 TV는 현실이 됐지만, 화상전화는 기술적으로는 현실이 됐음에도 보편화는 아직이고, 배달하지 않고 집집마다 자동으로 인쇄되어 나오는 신문은 현실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들 중 유독 신문만큼은 아직도 아침마다 문앞에 배달되어옵니다. 삼십 년 전 그대로의 그 방식 그대로입니다. 왜 그럴까요?
90년대에는 프린터 붐이 일었습니다. 개인용 컴퓨터들의 성능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도트매트릭스 프린터를 지나 잉크젯, 레이저 프린터가 나오면서 사무용 종이의 사용량이 급격히 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네트워크가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과 전자결재 시스템 등이 발달하면서 누군가 그랬습니다. '종이 신문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이죠. 컴퓨터에서 뉴스를 검색하고 보는 장점이 너무나 많으니 느리고 불편한 종이신문이 설 자리가 없어질 거란 예측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아직도 신문이 살아있습니다. 적어도 90년대보다는 컴퓨터도 훨씬 더 발달하고, 인터넷도 훨씬 빨라지고, 정보는 빠르고 넘쳐나는데도, 아침마다 천천히 소식을 전하는 종이 신문은, 주간월간 잡지들은, 종이에 인쇄된 매체들은, 죽지 않고(아니 심지어 더 늘기까지) 살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종이 인쇄물'들은 왜 안 죽을까요?
우리나라에 디지털 카메라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 게 아마도 2000년대 이후인 걸로 기억합니다. 90년대 후반에도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지금처럼 즐길만한 성능과 가격의 카메라가 시장에 나오기 시작한 건 그쯤 될 겁니다. 사실, 8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이 때는 우리나라에서도 '삼성항공' 등이 카메라를 만들어 전세계에 수출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의 카메라들은 사진을 모르면 사진을 찍는 일 자체가 어려웠지만, 누구나 셔터만 누르면 사진이 나오는 '전자동'카메라들이 나오면서부터는 아무나, 정말 아무나 손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이라면 아마도 "사진은 모른다, 찍기는 한다"라고들 했을 어르신들도, 애기엄마들도, 아이들도, 누구나 어깨에 조그만 카메라 하나 들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파인더을 들여다보고 줌을 밀고 당겨 구도를 잡은 뒤 셔터만 누르면, 노출이고 뭐고 나머지는 카메라가 다 해줬습니다. 의도는 반영하기 어려웠지만 실패하지는 않는 사진이 되었던 것이죠. 그리고 사진관에서는? '잘 나온 컷'들만 뽑아줬습니다. ^^;
포르쉐가 디자인했던 대박히트모델, 코끼리 카메라 4배줌, 케녹스 FX-4
그때 그 카메라 삼성 퍼지줌 AF-SLIM
그러다 디지털 카메라 붐이 왔습니다. 좀 비싸긴 해도, 필름을 넣을 필요도 없고, 찍으면 바로 볼 수 있고, 필요하다면 컴퓨터에서 인쇄하면 되고, 작고, 간단하고, 그리고 들고다니면 첨단으로 앞서가는 폼이 나는, 그렇게 편리할 수 없는 디지털 카메라, 디카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백만 화소를 넘어 2백만, 3백만, 4백만...
디카는 처음에는 매니아들의 전유물이긴 했습니다. 첨단 디지털 기기와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 아주머니, 어르신들은 한동안은 전자동 필카를 들고 여전히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하지만 점차 디카는 더 널리 보급되고, 놀이공원이나 여행지에서 그래도 꾸준히 보이던 그 전자동 필카들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마, 너무 앞서갔던 사람들은 거꾸로 다시 필름카메라에 관심을 가지게 됐던 모양입니다. 디카와 필카는 너무 많은 부분에서 달랐기 때문입니다. 디카를 만질만큼 만져본 사람들은 필카도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아마도,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였던 것 같습니다. 집집마다 이제는 시들해서 장농에 보관되던 카메라들이 발굴(?)되어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이 발명되고, 개인들이 간편하게 사진을 찍게된 지 수십 년, 그동안 만들어진 수많은 카메라들, 클래식 카메라들이 다시 꺼내져 필름을 먹게 됐습니다. 다시 그렇게 필름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났습니다.
과거의 전자동 카메라로 찍던 사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필름으로 사진을 찍어도 디카로 찍은 것처럼 컴퓨터로 즐기는 시대의 사람들이란 점입니다. 첨단 전자장비인 디카가 아니라 정말 기계적인 필카로 사진을 찍고, 현상하고, 스캔해서 컴퓨터로 보고, 종이 사진으로 뽑아보는 재미에 사람들은 다시 푹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라면, 다시 완전히 세상을 뒤덮을만큼 널리 유행이 되지는 못할 거라는 예측입니다.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많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즐기는 취미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필름으로 사진을 즐기는 비용은 점점 높아지고... 그래도 정말 즐기려는 사람들은 자꾸 줄어들 것 같습니다. 종이신문이 보여주는 생명력을 필름도 보여줄까요? 그렇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럼, 필름은 사라질까요?
네.. 사라지겠죠. 다만, 시간이 많이 걸려야 사라질 겁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수십 년 동안 생산된, 필름만 넣으면 멀쩡히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수억, 혹은 수십억 대의 카메라들이 있고, 그 카메라들은 필름을 필요로 합니다. 누군가 찍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게 바로 '수요'가 됩니다.
게다가, 의아스러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직도 필름카메라가 '새로' 생산됩니다. 니콘에서는 플래그십 필름카메라인 F6가 2004년에 나왔습니다. 라이카는 아직도 필름카메라를 신품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후지필름은 작고 매력적인 소형 필름카메라를 새로 새로 발매합니다. 일본의 코시나는 Voigtlander 상표를 달고 Bessa 필름카메라를 계속 내놓고 있습니다. 독일의 Zeiss Ikon은 코시나와 합작으로 새 필름카메라를 발표했습니다. Kenko는 중국에서 생산한 필름카메라를 내놨습니다. 러시아의 로모사는 로모 카메라를 계속 생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제품도 내놓습니다. 일본이나 중국과 다른 나라에서는 수많은 토이카메라들이 새로 나옵니다. 롤라이는 중형카메라인 Rolleflex를 현행 상품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린호프는 617 포맷과 같은 명품 중형/대형카메라들을 새로 발매하고 있습니다. 후지필름과 코시나는 합작으로 6x7 포맷의 중형 폴딩 카메라를 새로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Seagull, Mudan과 같은 중형카메라, 장성과 같은 SLR, 그리고 필름을 사용하는 똑딱이 카메라들이 아직도 많이 생산되고 있습니다(옥션이나 지마켓을 검색해보세요). 적어도 이 회사들은, 필름이 앞으로도 수십 년 동안은 계속 생산되리라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도 안되면, 후지필름처럼 카메라도 생산하고 필름도 생산하는 방식을 취할지도요.
2009년에는 판매될 것 같은, 후지필름의 새 중형 폴딩 카메라 GF670
(2017년 코멘트: 이 카메라 발매돼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다만 니콘의 F6이후의 필름카메라였어야 할 F7은 나오지 않았고, 코시나에서도 Zeiss에서도 새로운 필름카메라가 더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라이카에서는 몇 종류의 필름카메라들이 새로 나오긴 했네요. 로모는 새 필름카메라들을 꾸준히 내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새로 필름들이 나옵니다. 후지필름에서도 코닥에서도 새 필름들이 개발되어 판매됩니다. 물론 아그파는 경영난으로 다른 회사에 인수됐지만, 코니카도 그랬고 폴라로이드도 그랬고 포르테도 그랬지만, 그건 필름이 사라지는 수순이 아니라 시장의 변화로 인한 경영상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 회사들이 넘어가면서 사라져 더는 나오지 않는 필름들이 많습니다. 그건 참 아쉽습니다.
(코닥은 파산보호신청단계를 거쳐 그동안 단종시켰던 슬라이드필름을 2017년 4/4분기에 다시 내놓는다고 합니다)
2009년 3월에 새로 발매한다는 후지필름의 '수퍼리아 프리미엄 400' 필름. 기대가 크다.
(이 필름은 발매돼서 2017년 지금도 구할 수 있습니다.)
필름은 현재 일본, 미국, 유럽(영국, 헝가리, 체코, 크로아티아,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와 중국 등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생산하고 있지 않지만,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필름을 보면, 필름의 생명력은 길기도 하겠구나 싶습니다. 사실 옛날에는 유리판에 유제를 직접 손으로 발라 사진을 찍기도 했었으니까요.
(영국, 독일, 크로아티아 등에서는 필름을 만들고 있지만 이탈리아 러시아 체코 헝가리 등 많은 나라의 필름들이 사라졌네요.)
중국산 럭키 SHD100 흑백필름. 무척 저렴하다.
(중국의 필름생산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다시 만들까.. 그건 모르겠습니다.)
필름은 사라질까요?
다시 답을 하자면, 아니오입니다. 적어도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이 살아계실 동안은, 필름은 발매될 겁니다. 디지털카메라가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즐기는 사람이 있을테니 말입니다. 취미와 레져활동은 편하게 즐기는 게 아니라 '사서 고생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맛난 매운탕을 먹으려면 노량진에 가면 되지, 애써 낚시하러 갈 필요는 없을테니 말입니다. 필름카메라는 그 결과물이 디지털보다 무조건 더 좋아서 사용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 과정이 디카보다 더 고생(!)스럽기때문에 즐기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비용이 들고, 귀찮고, 오래걸리고, 불편하고.... 하기 때문에 즐겨지는 겁니다. 게다가 디카에서는 못 느낄 그 '맛'이 따로 있음에 말입니다. 낚시하면서 느끼는 그 '손맛' 같은, MTB 를 타면서 느끼는 그 심장 터질 것 같은 짜릿함같은...
필름 안 사라집니다. 즐깁시다.
(네 당분간은 안 사라질 것 같습니다. 10년쯤 후인 2017년에도 더 많은 분들이 필름으로 사진을 찍고 있으니까요.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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