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사진술'은 음영이 반대로 되어 있는 네거티브(Negative)의 형태로 발명되었습니다. 감광성을 띄는 은염(Silver-Halide)은 빛을 많이 받은 부분에 전하를 더 띄게 되어 현상액 속에서 은으로 더 많이 변하고, 이 결과로 필름의 베이스 위에 은의 불투명한 검정색 입자의 농도가 짙어져 새카맣게 상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밝은 부분은 현상된 필름 위에서 검게, 어두운 부분은 투명하게 보이는 역상, 네거티브의 필름을 얻게 됩니다.
이 필름을 인화지 위에 놓고 빛을 투사하면 필름의 어두운 부분을 통과한 빛은 인화지에 적게 닿고, 필름의 투명한 부분을 통과한 빛은 인화지에 많이 닿게 되어, 역시 은염 성분으로 이루어진 흰색의 인화지 위에서 다시 역상이 되어 흑백의 정상(Positive) 사진을 얻게 됩니다. 네거티브의 네거티브로 포지티브를 얻는 것이죠.
이 네거티브-네거티브 메커니즘은 매우 효율적입니다. 필름에 얻어진 네거티브 상으로부터 이런저런 조절(노광시간, 닷징, 버닝 및 인화지의 선택, 인화지 조작 등...)을 통해 매우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사진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필름 그대로도 정상의 상을 얻고 싶어했습니다. 필름의 네거티브는 종이사진으로의 '인화'를 위해 설계되는 것이어서 자체로는 실제의 장면보다 컨트라스트도 낮고 맨눈으로 보아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이 매우 제한적이지만 필름 자체만으로도 실제의 장면처럼 보이는 정상, 포지티브(positive)의 필름을 얻으려면 암부와 명부의 대비가 강한 전용의 필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컬러슬라이드 필름이었죠.
슬라이드(slide) 필름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고 있지만 사실 필름 자체의 특성을 나타내는 적절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일반 컬러필름을 '컬러네거티브 필름'이라고 부른다면 슬라이드 필름은 '컬러포지티브 필름'이라고 부르는 게 정확하겠죠. 역상으로 현상한다고 해서 리버설(Reversal) 필름이라고도 부릅니다. 슬라이드는 환등기로 스크린에 투영하기 위해 한 컷씩 잘라 네모난 틀에 끼워둔 형태를 말하고, 그 용도의 필름이기때문에 그렇게들 널리 부르게 된 것입니다.
컬러 포지티브 필름은 몇몇 용도를 위해, 그리고 그것이 가진 특성때문에 사진가들에게 매우 선망의 매체였습니다만 비싼 가격과 불편하고 번거로운 현상이라는 진입장벽이 있었습니다.
종이로 인화된 것만이 사진이었던 시대에 등장한 포지티브 필름은 필름에 맺힌 상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웠고, 그것을 환등기라는 장치를 통해 스크린에 투사하면 종이로는 얻을 수 없는 넓은 다이내믹 레인지의 재현으로 더욱 현실감있는 영상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극장에서 보는 영화장면이 실제처럼 아름답게 보이던 것을 상상해보시면 비슷합니다. 실제로 극장의 영화는 포지티브로 만들어진 영사용 필름을 화면에 투사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사실, 포지티브 필름의 역사가 짧은 것은 아닙니다. 에디슨이 활동사진을 발명하고 영화가 극장에 걸리던 시절, 아직 컬러 영화가 보편화되기 전 극장에 걸리던 영사용 필름들은 모두 흑백으로 된 포지티브 필름이었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네거티브로 촬영된 원본 필름을 영사용으로 다시 네거티브 듀프(Duplicate)함으로써 얻는 포지티브 필름이었을 뿐이죠. 상영본 필름을 다량으로 생산해야 하는 상영 배급용 필름을 제작하기에는 이런 네거티브-네거티브 필름 복사 방법이 유용했습니다. 컬러 영화가 보편화된 이후에도, 심지어 지금도 촬영은 컬러 네거티브 필름으로 하고 듀프로 포지티브 상영본을 만들어 배급하고 있습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영화용 필름'은 그래서 컬러네거티브 필름입니다.
그래서 현상하는 것만으로 포지티브 상을 만들 수 있는 필름은 컬러가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전설의 코다크롬이 그랬고, 이후에 만들어진 엑타크롬 역시 그랬습니다. 흑백필름도 포지티브 현상을 통해 정상의 상을 가진 필름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용도가 한정적이었습니다. 이왕 포지티브를 쓰려면 컬러를 쓰고 말았겠죠.
그래도 이런저런 목적과 호기심으로 흑백필름을 포지티브로 현상하는 수요가 조금씩 있었고, 네거티브를 얻기 위해 만들어진 일반적인 흑백필름을 리버설 현상해서 얻어지는 포지티브 상은 컨트라스트가 약했기에 더 많은 은성분을 도포한 포지티브용 흑백필름이 따로 만들어져 팔렸습니다. 그게 옛날에는 AGFA에서 만들어 판매하던 그 유명했던 스칼라 SCALA 필름이었고, 감도는 200이었습니다.
AGFA SCALA200x 패키징의 모습
이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서는 흑백 리버설 현상을 서비스하는 현상소에 보내야만 했었는데, 국내에는 없었기 때문에 일본이나 미국 등의 유명 현상소에 보내야 했고 그 과정이 어렵거나 불편하거나 비싸거나 오래걸리거나 해서 실제로 사용해보신 분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밖에 흑백슬라이드를 경험해볼 수 있는 방법으로는 코닥에서 발매했던 Tmax 필름용 리버설 현상킷 같은 것을 이용하는 것이 있었는데 수요가 많지 않아 잠시 적은 양이 수입되어 판매되고 사라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서비스하는 현상소가 없으니 직접 현상작업을 해야만 했었죠.
하지만 아그파가 문을 닫으면서 이 필름도 사라졌고, 필름 수요의 감소와 함께 잊혀지는 듯했었습니다.
하지만 2018년.. 현재 구할 수 있는 흑백 슬라이드 필름이 두 가지나 있으니 바로 포마에서 발매되는 포마팬 Fomapan R100과, 아그파의 혈통을 이어받은 ADOX의 스칼라 SCALA 160 필름입니다.
Fomapan R100과 ADOX SCALA160의 패키징 모습
포마팬 R100은 몇 년 전부터 국내의 모 업체를 통해 수입되었는데 약품이 수입되지 않아 현상할 방법이 없었다가 이제 약품도 수입되면서 자가현상하시는 분들은 직접 작업이 가능해졌습니다. 다만 매우 독한 약품, 번거롭고 조금은 까다로운 과정이 있어 자료나 동영상, 리뷰 등을 통해 충분히 사전정보를 확보하신 다음 작업하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판매되는 약품 킷은 8롤 정도를 권장 현상량으로 추천하고 있는데 가격도 상당하기때문에 그다지 경제적인 편은 아닙니다.
스칼라160은 국내에는 아직 판매하는 곳이 없습니다만 수요가 있으면 들어오겠죠. 박스포장은 없고 이렇게 벌크형태로 판매됩니다.
두 필름 모두 직구가 가능합니다만 포마의 경우는 국내 가격도 매우 합리적입니다.
베이스를 비교해봤습니다. 서로 확연히 다르네요.
이 필름들은 사실 일반 흑백필름과 구조상 다를 것은 없습니다. 보통의 흑백필름과 동일한 방법으로 현상하면 네거티브의 흑백필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리버설로 현상했을 때 풍부한 계조와 컨트라스트를 가질 수 있도록 더 많은 은과 유제를 발라놓은 것이죠. 은함량과 유제의 두께가 얇은 다른 일부 흑백 필름들은 리버설현상을 거치면 흐리멍텅하고 뿌옇게 나옵니다.
현상의 과정은 대충 이렇습니다.
1차현상 - 잠상을 은화시킵니다.
블리치 - 1차현상에서 만들어진 은 입자를 녹여냅니다.
재노광 - 남은 부분들(포지티브 성분들)에 빛을 쬐어 은화시킵니다.
2차현상 - 유제들을 실제 상으로 맺히게 합니다.
정착 - 남은 찌꺼기 유제는 녹여냅니다.
이렇게 현상과정을 거치면 흑백인데도 상이 정상으로 보이는 슬라이드 필름이 얻어집니다.
왼쪽(흑백슬라이드)과 오른쪽(컬러슬라이드)
현상된 포마팬 R100
현상된 SCALA160
컬러슬라이드필름도 루페나 환등기로 보면 마치 현실세계를 보는 듯한 입체감과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됩니다. 흑백슬라이드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이 흑백으로 보이지만 그 미려한 입체감과 선명함은 그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포마와 아독스 두 필름의 특성은 조금 다르기는 한데, 공통된 특징은 입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곱고 해상력이 좋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계조가 매우 좋은데, 컬러슬라이드필름은 발색과정에서 착색된 색상이고 흑백슬라이드는 은 성분이 그대로 상을 이루기때문에 계조특성이 다릅니다. 흔히 흑백사진에서 듣게 되는 '암부는 촬영에서, 명부는 현상에서'라고 하는 얘기는 네거티브인 흑백필름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흑백슬라이드는 암부를 풍부한 은성분으로 가지고 있어서 그 부분의 계조가 매우매우 풍부합니다.
컬러슬라이드필름의 암부를 뚫어내기 위해서는 매우 강력한 광원을 가진 스캐너가 필요한데, 흑백슬라이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면서도 보통의 네거티브 흑백필름이 가지는 명부계조를 반대로 암부가 가지고 있는 셈이죠. 암실에서 닷징하면서 살려내던 계조, 스캔하면서 명부쪽 커브를 만지거나 혹은 스캔후 보정하면서 명부를 살려낼 때 느꼈던 그 풍부함이 암부에 살아있습니다.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라, 애초에 제조될 때부터 더 풍부한 은 성분을 유제로 발라두었기 때문에 담아내는 계조 자체가 더 폭넓은 듯합니다. 루페로 들여다볼 때뿐만 아니라 스캔과정에서 조절하면서 느껴지는 자유도는 마치 디지털에서의 RAW 파일을 컨버팅해낼 때 느낄만한 엄청난 다이내믹레인지에 비견할만큼입니다.
루페로 볼 때 보이는 정도의 사진입니다.
창 밖의 명부를 기준삼아 밝기를 조정해서 스캔해봤습니다.
어두운 부분들을 끌어올려 스캔해봤습니다. 어렴풋이 오른쪽 어두운 벽의 벽돌패턴까지도 보입니다.
사실 흑백슬라이드는 일정한 부분 이상에서는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써보신 분들이 많지 않을테니까요. 하지만 루페나 환등기로 보고 즐기는 아날로그적인 부분 외에도, 스캔 이후에 디지털 이미지로 활용하고자 하는 부분에서 엄청난 강점을 가진 듯합니다.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해서 흑백으로 변환한 것과는 전혀 다른 아날로그 흑백사진의 특성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매우 뛰어난 샤프니스와 입자감, 그리고 엄청나게 강력한 계조특성과 다이내믹 레인지...
미확인 정보로는, 스칼라160은 역시 Adox의 상표로 판매되는 실버맥스 SilverMax 필름과 거의 같은 것일 거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은을 많이 넣었다고 광고하는 필름인데요, 그렇기때문에 리버설 현상을 해도 또한 뛰어난 슬라이드를 얻을 수 있을테니까요. 가격차가 크지 않다면 큰 의미는 없겠습니다만.
아름답고 뛰어난 흑백 슬라이드의 세계도 한번쯤 구경해보시는 것,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두 필름 모두 이제 국내에서 현상이 가능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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