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엡스-다게르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진술'이 발명된 게 1839년이니까, 아직 채 20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시간 동안 가장 보편적인 사진기술의 형태로 이용된 것이 필름이었구요.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필름사진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1997년에 상업적 형태의 디지털카메라가 백만화소(MP)를 넘어서더니 1999년에는 드디어 세계 최초의 디지털 SLR 카메라인 D1이 니콘에서 발표됩니다. 그러나 아직은 전세계 필름 사용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미디어와 보도부문에는 적용되지 못하다가,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드디어 하나 둘씩 이 첨단 장비들로 대체되어 가기 시작합니다.
세계적 추세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업계도 같은 출렁임을 겪었습니다. 오래도록 사진을 해온 분들이라면 기억하실 여러 현상소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2000년대 초기에, 드디어 한국의 언론사 잡지사들도 대거 디지털로 장비를 바꿉니다. 이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여러 현상소들이 문을 닫게 됩니다. 지금도 '충무로 현상소'를 검색해보면 이미 십여 년 전에 문을 닫은 여러 현상소들의 이름이 검색됩니다.
하지만 거꾸로 매우 고가였던 디지털 SLR을 비롯한 좋은 품질의 사진 장비들이 대중화되고 널리 보급되면서 다시 사진 붐이 옵니다. 그 중 일부의 아마츄어들이 필름사진을 다시 접하게 되고, 충무로에는 오히려 몇 곳의 현상소가 생겨납니다. 큐픽도 그 중 한 곳이었죠.
그러다 디지털 카메라의 기술발전도 정체되고 휴대폰 카메라의 성능이 좋아지면서 오히려 사진시장은 급격히 위축되고 맙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카메라 업체들뿐만아니라 전통적인 필름과 인화지, 약품을 생산해오던 많은 업체들이 드디어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Forte, Efke, Ferrania와 같은 필름과 인화지 전문업체들, 규모가 컸던 Konica와 Agfa가 필름사업 자체를 접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2012년, 종국에는 사진계의 거인 Kodak마저 파산보호신청을 내고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시기에 국내에는 '코닥이 망했다'라고 잘못 보도되면서 아주 없어진 것으로 오해를 샀지만, 특허를 팔고 사업을 정리하고 남은 여러 부문이 가치를 인정받아 바로 이듬해 파산보호를 졸업하기에 이릅니다. 코닥의 필름과 인화지를 비롯한 아날로그 부문은 Kodak Alaris라는 이름으로 종전 코닥의 최대주주 중 하나였던 영국자산공사에 의해 인수되어 별도 회사로 독립하는데, 아쉽게도 파산보호 진행 과정에서 수많은 필름들이 단종되고 인화지의 생산도 중단되었었습니다. 모든 슬라이드필름들이 단종되었고, 골드 시리즈는 단순화되었으며 프로용 필름이었던 울트라컬러(UC)도 없어졌습니다. 포트라는 VC와 NC를 통합하면서 한가지로 정리됐고, Tmax3200(TMZ)와 PX, IR(적외선) 필름들이 모두 단종되었었습니다. 그나마 Ektar가 새로 발매되면서 필름사진 애호가들에게는 한 줄기 위안이 되었었더랬습니다만.
한편 후지필름은 코닥과는 다른 방향으로 생존을 도모하고 있었으니, 점점 매출과 수익이 줄어가는 필름과 감재사업의 비중을 줄이고 새로운 먹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필름용 유제와 젤라틴, 콜라겐, 그리고 화학적 가공에 대한 노하우를 쌓아온 덕분에 후지필름은 전혀 완전히 새로운 분야인 화장품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고, 그밖에도 의료나 전자기기, 디지털카메라 등의 사업이 성공적으로 확장되면서 필름산업 이후의 체제로 완전히 체질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면 세계적으로도 2000년대 후반이 필름시장의 최저점이었으며, 국내뿐만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사진용 필름사업은 이제 사라져버릴 분야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충무로에서도 2010년에서 2012년께까지 여러 현상소들이 문을 닫거나 규모를 줄이는 등의 부침을 겪었습니다. 2003년에 이은 두 번째 출렁임의 골짜기였던 셈이죠.
2006년쯤엔가 필름사진을 많이 찍고 즐기던 한 사진동호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던지던 질문을 기억합니다.
'필름 언제까지 나올까요?'
당시에는 '10년 정도는 나오지 않겠냐' 라든가 '지금이라도 즐기자' 정도의 얘기들이 오갔었습니다.
(여담이라면, 이러던 시절이었던 2005년 말에 '큐픽'이라는 현상소를 만들었고, 2007년에는 충무로에 문을 열었고, 그 해 10월에는 '이루의 필름으로 찍는 사진'이라는 책을 쓰고, 2008년에는 대대적으로 큰 규모의 '큐픽'이 오픈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해 5월에 찾아온 촛불정국, 그리고 10월에 찾아온 외환위기 등으로 국내 정치와 경제가 휘청이고 경영이 힘들어지고,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되었죠. 그러다 2009년 말에 큐픽에서 나와 포토마루를 창업하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시장도 정세도 읽지 못하고 계속해서 거꾸로 거꾸로 불 속으로 뛰어들었었군요...)
그렇게 춥고 긴 필름사진 업계의 겨울이 계속되는가 싶었는데, 휴대폰에 장착된 카메라들의 성능이 좋아진 건 오히려 사진시장의 활성화를 불러왔습니다(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를 위시로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사진에 눈을 뜨게 됐고, 시간이 지나는 동안 휴대폰의 카메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더욱 고성능의 디지털카메라는 물론 #filmisnotdead 라는 해시태그를 필두로 필름사진까지 서로 올리며 공유하게 되면서 조금씩 필름사진에도 훈풍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춥고도 추웠던 아마도 2014년께의 어느 날부터,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한 전화들이 있었으니 '필름 넣고 사진 찍었는데 현상 어떻게 하나요'라는, 필름을 처음 써보신다는 젊은이들의 문의였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새로 필름사진을 접하는 분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2015년, 16년이 지나면서 국내에서는 필름사진 현상과 스캔의뢰가 늘어나는 것을 보았고, 세계적으로도 문을 닫았던 이탈리아의 Ferrania는 킥스타터의 펀딩을 통해 '회사를 다시 세우고 필름을 생산하겠다'는 소식을 전해왔으며 2017년 벽두에는 코닥이 '슬라이드필름을 다시 만들겠다'는 발표를 하기에 이릅니다. 많은 분들이 깜짝 놀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블로그에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올렸던 포스팅도 수만 회 이상의 방문자를 기록하며 널리 알려졌었습니다.
다 없어지고 사라질 줄 알았던 필름들이 이런 이름 저런 이름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새로 발표되었고, Berrger, JCH, Oriental 등의 새로운 흑백필름들이 나왔으며 Ferrania도 P30이라는 필름을 발표했습니다. Foma와 Adox도 이제 더는 구경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흑백 슬라이드필름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고, 성능은 아쉬웠지만 CR200, Wittner, VarioChrome과 같은 슬라이드 필름들도 만들어져 나왔습니다. 코닥은 아직 Ektachrome을 발매하지는 않았지만 시장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단종 6년만에 Tmax3200 필름을 재발매했습니다.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Ektachrome E100 필름도 올 여름께에는 다시 판매를 시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코닥이 파산보호를 신청했던 그 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필름으로 100년 넘게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았겠지만 이제는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규모를 줄인다면 여전히 필름으로도 아주 오랜동안 많지 않은 사람들은 따뜻하게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지금의 사진용 필름산업의 경제적 규모는 보잘 것 없습니다. 하지만 규모가 작은 필름 회사들은 지금의 규모만으로도 충분한 사업을 영위할 만큼이 되겠죠. 코닥이 다시 필름을 내놓으려고 하고 사진용 필름에 열심인 이유는 충분한 구조조정을 거치고 난 뒤 필름사진 사업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 규모를 만들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후지필름의 다른 부문의 매출은 더욱 신장하고 있고 따라서 필름사업 부분의 매출비중은 더욱 작아지고 있습니다. 전체로 보면 필름사업은 안 해도 그만인 셈이 되어갈 것입니다. 실제로 후지필름은 지난 기간동안 계속해서 생산하고 있는 필름의 종류를 줄이고 있습니다. 리얼라를 단종시켰고, 소매용 패키지로는 감도 100의 네거티브를 아예 생산하지 않은 지 오래고, 프로비아400을 없앴고, 네오판1600과 400에 이어 이제 아크로스100도 단종하겠다고 합니다. 수퍼리아1600과 내츄라1600도 단종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꾸준히 가격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아그파에 '비스타'로 공급하던 OEM 제품도 더는 공급하지 않고 없앤다고 합니다. 조금씩 시장눈치를 보면서 돈도 안되고 귀찮기만 하고 신경은 쓰이는 필름사업 부문을 구조조정하고 있는 겁니다. 2005년의 아그파였다면, 2007년의 코니카미놀타였다면 후지필름도 청산 혹은 매각으로 없애버렸을테지만, 2018년이어서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있는 거겠죠.
2007년 DNP에게 필름 재고분과 아날로그 사진부문을 매각했던 코니카미놀타도 다른 부문으로 먹고는 살고 있지만 미놀타 부문까지 소니에 넘기면서 이제 사진을 했던 회사라는 흔적은 거의 지워져가고 있습니다. DNP는 필름설비는 모두 없애고 재고만 센츄리아로 포장해서 팔아치우고는 인화지와 감재만 팔다가 이제는 그것도 시들하다고 하죠.
후지필름은, 아직도 디지털카메라와 사진용 제품들을 만들어 판매하고 사진문화를 지키고 있는 회사로서 아무리 다른 분야가 잘 돼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더라도 그런 만행을 저질러 수많은 사진필름 애호가들에게 잔인하고 매정한 회사라는 낙인을 찍히는 건 두려운가 봅니다. 일본에는 그런 문화가 조금 있죠.
사진용 필름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코닥과 후지필름은 아이러니의 극을 보여줍니다. 필름을 고집하다 망할뻔한 코닥은 그래도 필름으로 오래오래 갈 것 같고, 다른 걸로 잘 먹고 잘 살게 된 후지필름은 필름따위 접어버리고 배나 튕길 것 같고..
그래도 '필름'회사라고 '후지필름'이라는 이름을 고수하고 있는 후지필름. 하지만 이제는 눈치를 보며 '필름'을 떼어버리고 싶어하는 후지. 사실 이미 후지필름의 고모리 회장도 그냥 후지필름이 아니라 자본회사인 후지필름 홀딩스의 회장입니다.
아크로스 100 필름의 생산종료를 발표하던 그 때 페이스북의 수많은 필름사진 애호가들은 #fujifilm 대신 #fujiNOTfilm 이라는 태그를 달며 후지필름을 비난하고 아쉬워했습니다.
'당신들은 필름회사가 아니고 싶어하는구나'
필름사업부문을 정리하거나 매각하기 전에 너무 많은 필름산업의 유산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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