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는 새로운 필름카메라가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새로운 필름들이 나온다는 얘기들이 있었고 여러 새로운 필름인 척(?)하는 필름들을 시중에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새로운 필름이라기보다는 리브랜딩(원단을 가져다 감아서 자신들의 상표를 부착해서 파는, 일명 택갈이)한 필름들의 종류가 더 많았어요.
주로 코닥의 영화용 필름들을 감아서(respooling) 자신들의 상표를 붙여 파는 일이 흔했고 그나마 새로 개발된 ORWO의 NC시리즈의 벌크필름을 로딩해서 파는 경우, 그리고 항공촬영용 필름을 이용해서 감아 파는 경우 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흑백필름도 그랬죠.
ORWO의 NC500
그래도 마치 시중에 다양한 필름들이 새로 나오는구나, 하는 착시를 불러일으켜줘서 고맙기는 했는데, 와중에 시장성을 본 필름 제조사들이 나름의 노력을 했습니다.
하만의 피닉스200
그리고 켄트미어 200
일포드 상표로 흑백필름을 제조해온 하만이 피닉스200과 Red라는 필름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국내 정발은 되지 않았지만 저렴하고 성능이 좋은 켄트미어 라인업에 감도 200짜리를 추가했습니다. 곧 수입되겠죠.
그리고 들려온 소식.. 중국 럭키가 컬러필름을 다시 내놓는다고요.
공홈인 luckfilm.net에 뜬 럭키 200
대충 10년은 넘은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만들어지던 컬러필름들이 몇몇 있었는데, 당시 4대 메이저 브랜드인 코닥, 후지, 코니카, 아그파에 비해 성능은 떨어지지만 저렴한 가격과 나름의 느낌때문에 종종 즐겨 사용했었죠. 중국에서 만들어지는 필름들로는 컬러/흑백을 모두 생산하던 럭키, 컬러필름만 만들었던 Sunny16, 흑백만 만들었던 상하이, 그리고 또 뭐더라.. 등이 있었습니다. 진짜 싼맛에 쓰곤 했어요.
하지만 시장수요가 많아지고 필름 가격도 몇 배로 뛰어 이제 다시 만들면 시장성도 수익성도 좋을 거라고 판단했나봐요. 럭키 200필름이 부활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조만간 발표된다고 하네요.
그리고 또 하만에서도 새로운 필름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레딧에서는 7월 중순쯤 Phonix 2가 발표될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돌고 있네요. 체코의 한 현상소에서 올린 스토리에 시퍼런(!) 패키징의 이미지가 나타나기도 했었답니다.
파란 봉황?
약품 수급의 문제 등으로 국내 현상 시장이 불안하기는 합니다만, 이런저런 소식들은 반갑습니다. 저도 몇가지 필름들을 입수했으니 전처럼 테스트 촬영이 끝나면 올려보겠습니다.
지난해에 영국 Harman에서는 Phoenix라는 컬러필름을 내놓았습니다. 새로운 컬러필름에 대한 갈증과 기대가 워낙 컸던 터라 베일을 벗고 모습을 드러낸 성능에 많은 분들의 호불호가 갈렸었습니다. 하만은 계속해서 성능을 개선하고 새로운 필름을 내놓겠다는 약속을 필름사진 애호가들에게 내놓았었는데요, 피닉스의 성능개선판 혹은 후속필름의 첫 시리즈로 RED라는 필름이 곧 출시된다고 해서 급히 달려가 한 롤을 요청해봤습니다.
첫 인상은 '레드??' 였습니다. 패키징에는 REDSCALE이라고 쓰여 있고 박스는 붉은 색입니다. 레드스케일은 거의 20년 가까이 전부터 로모그래피에서 발매를 시작해서, 여러 브랜드에서 판매하기도 했던, 필름의 유제면을 뒤집어 오렌지 마스킹이 색필터 역할을 하도록 한 특수효과형 아이디어 필름입니다.
컬러필름은 하나의 필름면에 시안, 마젠타, 옐로우의 색을 분리해서 층별로 노광하여 담기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그러기 위해 부정색성을 제거하는 필터층, 할레이션 방지층 들이 겹겹이 발라져 있고 이 때문에 현상하고 나면 베이스가 주황색으로 보입니다. 이것을 오렌지마스킹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뒤집어 사진을 찍으면 두 가지의 현상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필름면의 두께 때문에 미세하게 초점이 덜 맞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색필터 배열이 거꾸로 되기 때문에 오렌지색 필터를 사용한 것처럼 붉은 사진이 찍힌다는 점입니다. 아, 색필터를 사용한 것과 유사하기때문에 2스톱 정도의 유효감도가 떨어집니다. 400짜리 필름을 100 정도로 찍어야 제대로 노출을 얻을 수 있죠.
보자마자 든 생각은 '피닉스200 필름을 뒤집었나?'였습니다.
하지만 곧 '오호라'하는 생각이 같이 들었는데요, 이 레드 필름의 유효감도가 125라고 되어 있는 부분때문이었죠. 그렇다면 뒤집기 전의 필름 감도는 400을 넘는다는 건데, 아시다시피 피닉스는 100에서 125 정도로 촬영해야 더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으니 피닉스를 그대로 이용해서 만들 수는 없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거든요.
피닉스200 필름과 패키징을 비교해봤습니다.
약간 오렌지색에 가까운 피닉스에 비해 레드는 진짜 선홍색으로 붉은 박스, 그리고 파트로네의 색도 진홍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붉은 사진을 만들어주려나?
많은 분들이 사용해보셨듯이, 피닉스는 이전의 보편적인 컬러필름들과 유사한 오렌지마스킹이라기보다는 자주색, purple에 가까운, 마치 핑크빛이라고 할만한 마스킹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붉고 푸르고 노출에 따라 이리저리 야생마처럼 튀는 색상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 마스킹을 뒤집으면 핑크빛의 보색인 녹색 계열로 사진이 나오게 되어야 합니다.
'오호라??'
피닉스의 기술을 이용하긴 했더라도 뭔가 다른 필름인 것은 명확해보였습니다. 레드스케일로 발매된 것은 아쉽긴 하지만, 또다른 새로운 필름인 건 분명한 듯합니다. 아무튼, 테스트 사진을 촬영하기 전에 일단 이리저리 살펴보았습니다.
플라스틱 통 뚜껑 색이 선홍색인데 이게 사진으론 잘 표현이 안될만큼 예쁩니다. 이건 분명 마케팅 포인트일 뿐이겠지만 솔직히 이게 너무 예쁘더라구요. 버리지 않고 킵합니다.
피닉스와 필름면을 육안으로 비교해봤습니다. 앞 뒤로 비교해보니 거의 유사한 설계와 유제로 되어 있는 것처럼 색상이 비슷합니다. 같은 기술로 만들어 뒤집은 형태인 게 분명해보이긴 합니다.
혹시나 싶어 아예 이어붙여 보았습니다.
현상전에는 구분이 거의 안될 것 같습니다. ㅋㅋ
테스트롤을 현상해서 현상된 두 필름을 비교해봤습니다.
확실히 피닉스는 핑크 혹은 보라색에 가깝고, 레드는 훨씬 투명하고 마스킹이 연합니다. 레드에 촬영된 네거티브 이미지는 마치 파란 색으로까지 보입니다. 이러면 레드로 촬영된 사진을 스캔해보면 노란 색 계열로 나올 게 분명합니다만 필름 이름은 레드..네요.
그리고 계조는 어떨까, 입자감은 어떨까 궁금했습니다. 이전의 피닉스와 유사한 기술과 스타일이라면 계조도 입자감도 쉽지는 않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뭔가 다른 필름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궁금증이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 얼른 작업해보았습니다.
추운 날씨라 속사로 촬영하기 위해 리코 GR-1v 기종을 사용했고 명동과 충무로 일대를 순식간에 돌았습니다. 주광과 그늘, 실내, 인공조명 등을 골고루 촬영했지만 다 소용없고 꽤 레디시한 모노톤에 가까운 레드스케일 이미지들을 만들어 주었네요.
참, 영하 10도에서 종종 뛰어다니며 얼른 찍은 막샷이니까 잘 찍었네 못 찍었네 하시기는 없기 입니다 ㅎㅎ
약간 붉은 톤으로 스캔한 이미지들입니다. 일단 색상만 보면 '레드'해 보이기엔 좀 덜한 것 같습니다. 현상된 네거티브에서 보았던 이미지는 파랑이었죠. 조정하지 않고 그대로 스캔하면 그린톤이 도는 노란 이미지가 나옵니다. 붉게 조절하면 더 예쁜 붉은 톤이 됩니다.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사진들인 것 같습니다. 몇 개만 만져보죠. 그러면 놀랍게도 예전의 레드스케일 필름들에서 본 것보다도 더 예쁜, 아주 예쁜 사진들이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조정해보니 더 안정적이고 예쁜 레드톤의 사진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톤이 매우 일정하고, 피닉스와는 완전히 다르게 계조가 매우 풍부하고 명부와 암부를 모두 잘 담아내고 있으며 400을 넘는 고감도일 것임에도 입자감이 아주 곱고 좋다는 점은 서프라이즈입니다. 레드스케일로 발매되었을 뿐이지, 피닉스200과는 아주 많이 다른, 성능이 뛰어난 필름임에 틀림이 없어보입니다.
********* 이 부분에서 놓친 게 많이 있었어요. 스캐너에 따라 결과물의 특성차이가 크다는 건데, 계조를 읽어내는 능력, 색을 조합하는 알고리즘에 따라 노리츠, 후지, 코닥, 엡손 및 기타의 스캐너가 전부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내더군요. 일단 노리츠나 후지 스캐너로는 가능한 작업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파노라마나 하프포맷인 경우는 하는 수 없겠지만요 ㅠ ************
(이 필름을 다시 뒤집어 레드스케일이 아닌 정상으로 촬영하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다시 생겼습니다. 이건 제가 한번 더 해보고 결과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한 롤을 마구 찍어보고 내린 몇 가지 판단입니다:
- 피닉스를 만든 하만의 자체 기술로 제작되었다
- 새로운 고감도의 컬러필름을 이용했다
- 노출차가 큰 장면에서도 명부와 암부를 고루 담아낼만큼 계조가 좋다
- 100이나 50으로 찍어도 좋을 것 같다
- 더 붉게 레드톤으로 보정하면 더 예뻐진다
- 가격은 조금 아쉽다
레드스케일이라는, 독특하고 매니아틱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깜짝 놀랄만큼 좋아진 이 필름 자체의 성능때문에 후속작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지게 만드는 필름인 것 같습니다.
2025년 2월12일 수요일에 정식 발매 예정이라고 합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꼭 구매해서 찍어보세요. 이 장면이 이렇게 담긴다고? 하는 깜짝 놀람스러운 사진을 만들어줄 필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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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하고 궁금해서 뒤집어서 촬영해봤어요. 해외 유튜버도 해봤더라구요. 과연 어떤 필름을 만들다 말고 뒤집어 감아서 발매한 걸까 싶었는데 결론은 피닉스를 뒤집은 게 거의 맞습니다. -_- 다만 현상된 필름 베이스에서도 구분되는 것처럼 실효감도를 높이기 위해 베이스의 마스킹 코팅을 다르게 했네요. 400으로 촬영했는데 적정에 가까운 노출이 나온 걸 보면 말이죠. 그냥 피닉스를 뒤집었다면 125로 찍어야 했겠죠. 이미지는 대략 피닉스와 비슷하면서 베이스때문에 아주 약간 다른 정도입니다. 쩝.
아쉬웠어요 ㅎㅎㅎ
덧:
피닉스가 그랬듯이, 이 필름도 작업에 따라 결과물이 많이 달라질 겁니다. 직접 스캔해보아도 특성을 아실 수 있을 거구요. 현상소에 맡겨 현상과 스캔작업을 의뢰한다면 또 현상소마다 작업할 때마다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어느 곳에 맡기면 어떻게 나온다 하고 예측할 수는 없지만, 위의 작례와는 아마도 많이 다르게 나올 겁니다. 취향에 따라 어떤 결과물이 좋을지는 다른 분들의 결과물을 참고하거나 아니면 직접 맡겨 보고 판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