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쯤 '다시 생산할까?'라는 티저를 일부의 다른 매체를 통해 흘린 바 있었기때문에 혹시나 하는 바람을 가졌었습니다만, 후지필름으로부터 들리는 소식은 계속해서 '가격을 올리겠다, 이런저런 필름은 단종시키겠다'는 것이었기때문에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보였습니다. 그런데 느닷없는 재발매 소식으로 많은 분들이 환호(!)하고 있는 중입니다.
[ "네오판 100 ACROSII '의 특징]
우리 자신의 "Super Fine-Σ 입자 기술"(* 1)을 채용하여 감도 ISO100의 흑백 필름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입상 성을 실현.
당사 종래 품 「네오빤 100 ACROS "에 비해 하이라이트 부분의 계조를 신축성이있는 디자인으로 입체적인 계조 재현이 가능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선명도에 따라 피사체의 윤곽을 강조했다 묘사가 가능하다.
(이상 후지필름의 뉴스릴리즈 번역)
라는 특징을 가졌다고 하고, 2019년 가을에 35mm와 120포맷으로 발매한다고 합니다. 가격이 관건이겠습니다만, 발매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긴 합니다.
다시금 필름사진을 많은 분들이 즐기게 되면서, 옛날에 제조-판매되었지만 미처 사용하지 않은 필름들이 발굴(!)되어 드디어 빛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필름들은 국내에서는 사진동호회의 장터나 중고거래 장터, 혹은 드물게 필름 기자재 상점에서도 구할 수 있는 경우가 있고, 외국에서는 ebay 등의 마켓플레이스에 올라온 매물을 구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진용 필름들은 제조일자로부터 2년 정도를 유통기한으로 표기해서 판매됩니다. 유통기한은 필름이 포장된 종이박스에 찍혀 있습니다. 종이 박스를 열고 필름을 꺼내면 플라스틱 통 안에 필름이 들어 있습니다. 중형 필름들은 마치 사탕봉지처럼 비닐 혹은 종이로 포장되어 있죠. 이렇게 종이 상자 포장을 벗겨내면 유통기한 표시가 사라져 정확히 언제 제조된 것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어쨌든, 유통기한을 지나버렸다는 건 언젠가 알 수 있겠죠.
이렇게 오래된 필름들을 항간에는 빈티지필름이라고 부르거나, 혹은 단종되어 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원래 발매당시의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필름의 성능은 떨어지는 것이어서 더 비싼 가격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오래된 필름으로 촬영해서 나오는 색바랜 혹은 제대로 발색이 이뤄지지 않거나 특성이 발현되지 않아 생기는 여러 경우의 미흡한 사진들을 '빈티지'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최근 몇 년간 불어온 필름사진 유행을 틈타고 등장한 조악한 상업주의에 이끌린 결과라고 봅니다. 특히나 이런 필름들은 얼마나 오래됐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보관되었는지에 따라 상태가 달라지기때문에 시험삼아 촬영하고 현상해보기 전에는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기도 합니다.
오래된 필름들(expired films)은 원래의 싱싱한 필름에 비해 여러 성능과 특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미세하게 노광되어 탁해지는 포깅(fogging), 유제의 반응력이 약해져 생기는 감도저하, 베이스의 경화로 인한 컬링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의 종합적 결과로 발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색이 틀어지거나 노출이 부족하다거나 그레인이 더욱 거칠게 올라오거나 하는 등의 증상이 생깁니다. 이 중에 특히 원래의 감도로 촬영해도 노출이 부족해지는 감도저하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그래서 '오래된 필름으로 촬영할 때에는 노출을 더 주어라'거나 '더 낮은 감도로 촬영해라'와 같은 팁들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유통기한 몇 년당 몇 스톱'과 같은 식으로 노출을 더 주라는 분들도 계시는데,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보관된 기간보다는 보관된 상태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테스트해보기 전에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필름이 여러 롤이라면 한 롤을 테스트해보고 나머지 롤을 찍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도 있겠죠. 이런 필름들을 다량 판매하는 업자 혹은 개인이더라도 전문 판매자 같은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미리 테스트를 해보고 적정 권장 감도를 알려주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오래되었더라도 냉장 혹은 냉동 등으로 보관이 아주 잘 되었다면 거의 제 감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출을 더 주어라'라고 하는 팁은 네거티브 필름에만 해당됩니다.
네거티브 필름은 노출을 더 주면 빛을 받은 부분의 상이 진하게 맺힙니다. 감도저하에 의한 노출부족이라는 건 상이 약하게 맺힌다는 거니까, 더 노출을 주면 상이 진해져서 보다 나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는 거죠. 물론 이렇게 해도 너무너무 변질이 심한 필름은 포깅이 완전히 진행되어 베이스 자체가 타버리는 경우도 있고, 감도저하가 너무 심해 상이 맺히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강제로 노출을 더 주었더라도 각 색상별 유제층의 반응이 달라 정상적으로 발색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색이 틀어진 것을 빈티지하다며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기는...)
그럼 슬라이드(포지티브positive 혹은 리버설reversal) 필름인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유통기한을 지나 변질된 슬라이드필름들은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를 보시죠.
현재 우리가 시장에서 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슬라이드필름은 엑타크롬(ektarchrome) 입니다. 코다크롬(kodachrome)이 있었지만 이제는 필름도 구할 수 없고 현상도 되지 않죠. 엑타크롬의 특징들 중 하나가 암부쪽으로 마젠타의 경향을 띄기 쉽다는 점입니다. 많은 엑타크롬류의 필름들이 유제가 변질되기 시작하면 암부의 농도가 떨어지고 이게 마젠타를 띄는 원인이 됩니다.
더 변질된 필름은 더 투명해집니다.
이런 순서로 변질이 진행됩니다. 맨 아래 완전히 투명한 필름은 네거티브 필름의 경우라면 완전히 새카맣게 포그를 먹어 상이 구분되지 않는 필름인 경우와 같겠죠.
슬라이드필름은 베이스가 까맣게 나올 수 있어야 비로소 촬영한 상이 제대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통기한을 지나 오래되어 변질되기 시작하면 베이스가 약해지기때문에 상이 약해보이게 되는 것이죠. 네거티브라면 노출을 더 주어 명부의 상을 진하게 맺히도록 해서 사진을 얻을 수 있지만, 슬라이드는 투명한 부분이 명부이고 암부는 베이스 자체의 어두운 색이 담당해야 하는데, 이 베이스가 점차 투명해지기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되게 됩니다.
노출을 더 주면 그냥 상만 날아가버리게 되고 맙니다.
노출을 더 준다고 베이스가 짙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통기한을 많이 지나 변질이 심해진 슬라이드필름이더라도 노출을 더 주어서는 안됩니다. 틀어지고 약해진 상은 일단 스캔한 다음 보정을 통해 살려내는 정도가 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증감현상도 베이스를 진하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마찬가지 결과가 됩니다.
편법이 하나 있다면 크로스현상하는 것입니다. 슬라이드필름이지만 네거티브로 현상하는 것이죠. 이렇게 하는 경우엔 노출을 더 주는 것이 의미가 있어집니다.
만일 몇 롤을 가지고 있는데 한 롤 찍어보았더니 많이 변질되어 사진이 희미하게 나왔다면 원래의 감도보다 더 노출을 주고 네거티브로 크로스현상하는 것이 보다 나은(?) 사진을 얻을 수 있는 대안일 수 있겠습니다. 얼마나 더 노출을 주어야 하는지 또한 테스트를 거친 다음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참, 엑타크롬 슬라이드들이 전부 유통기한을 지난다고 마젠타를 띄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필름들의 경우는 이렇게 녹색혹은 그밖의 이상한 색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유제층의 구성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는 많은 분들이 '흑백필름'은 흑과 백으로 나오는 필름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 같네요.
Black & White Film은 까만색과 하얀색만 있어서 사진이 까맣게 하얗게 나오는 게 아니라, 색정보는 기록하지 않고 단일톤의 계조(밝고 어두운 상)만 담는 필름입니다.
색을 나타내지 않는 인화지에 인화하니까 흑과 백으로 나온 거지만, 실제로는 검정 흰색만이 아니라 무수한 여러 밝기의 회색 톤들이 연속되는 상을 표현하죠.
흑백필름은 실제로 완전히 흑과 백이지 않습니다. 베이스(필름 자체의 셀룰로우즈)는 대개 옅게 색을 띕니다. 어떤 것은 푸르스름하거나 어떤 것은 옅은 보라색을 띄기도 하고 현상약품에 따라 그 색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컬러필름을 스캔하듯 색정보를 읽어들여 반전시키면 해당 색상의 보색으로 보이겠죠. 옅은 마젠타나 세피아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캐너들이 가지고 있는 컬러필름 스캔 알고리즘은 대개 컬러필름들의 오렌지마스킹(컬러필름들은 오렌지색 셀룰로우즈 베이스를 가지고 있죠?)으로부터 제대로된 색을 뽑아내기 위한 알고리즘들을 가지고 있어서, 오렌지마스킹이 없는 흑백필름들을 컬러모드로 스캔했을 때는 해당 필름의 이미지 분포에 따라 컬러가 일정하지 않고 세피아나 혹은 컬러톤이나 등등이 들쭉날쭉하게 됩니다. 어떤 컷은 좀더 흑백으로 보이기도 하고 어떤 컷은 좀더 붉거나 더 옅거나 진하거나 그렇게 되는 일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컬러모드로 스캔해도 비교적 온전한 흑백처럼 보이도록 오렌지마스킹을 가지도록 만들어지고, 컬러약품을 이용해서 현상하는 필름이 코닥에서 나왔던 BW400CN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필름은 컬러사진만 뽑게 되어 있는 예전의 아날로그 QSS 장비를 이용해서 컬러인화지에 인화해도 흑백처럼 보였죠. 하지만 실제로는 컬러모드로 스캔해보면 미묘한 색이 낍니다. 아직도 일포드에서 만들어지는 XP2는 오렌지마스킹을 가지고 있지 않아 이런저런 색들이 불규칙하게 낍니다.
어떤 스캐너도 흑백을 흑과 백으로 스캔하지 않습니다. 스캐너는 절대적인 장비가 아니라, 필름으로부터 정보를 읽어들여 디지털 정보로 변환하는 AD 컨버터이고, 읽어들인 정보를 알고리즘으로 처리해서 이미지로 만들어 저장하는 소프트웨어와 함께 돌아갑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흑백필름이어도 베이스는 색을 가지고 있으니 그 정보도 읽어들여집니다. 하지만 흑백 모드로 설정하면 흑백 정보만 취하고 컬러정보는 버리는 거죠. 흑백필름이라고 해서 읽어들인 정보를 반전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절히 농도와 컨트라스트를 조절해야 보기 좋은 흑백 이미지가 됩니다. 이것 역시 스캐너의 알고리즘으로 동작합니다. 최종적으로는 흑백의 이미지로 저장되어야 흑백이 되죠. 흑백 이미지로 저장하는 방법은 8비트 혹은 16비트의 RGB값을 모두 갖지만 그레이 값들 - 0,0,0은 검정, 128,128,128은 중간회색, 255,255,255는 흰색인 것과 같이 RGB 값이 모두 동일한 색상들만 - 으로 저장하는 것과 실제 grayscale만으로 이뤄진 포맷으로 저장하는 수가 있고, 활용성에서는 RGB 이미지가 편리하므로 보통은 컬러정보가 일부 남아 있더라도 채도를 빼주는desaturate(흑백변환)등의 방법으로 흑백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흑백필름은 색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위적인 색정보를 넣더라도 모노톤이 되어야 합니다. 세피아톤의 사진이라고 흑백이 아닌 것이 아니고, 애초에 종이가 색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톤의 흑백사진이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컬러정보를 제거하지 않고 스캔하면 흔히 '잡색'이라고 하는 톤들이 남아있게 되는 거죠.
컬러필름을 스캔했는데 흑백으로 나오면 스캔을 잘못했다고 생각하실테죠. 흑백필름을 스캔했는데 색이 끼어 나오면 역시 스캔의 문제이지, 필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흑백필름을 컬러가 나오게 현상할 수 있지 않습니다. 흑백필름은 제조과정에서부터 베이스가 가진 색상 이외의 컬러를 담을 수 없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흑백필름을 현상하고 난 다음 눈으로 보이는 네거티브 상은 컬러를 갖지 않습니다. 성분적으로 그것은 은 silver 입자들입니다. 컬러필름에서 보이는 색을 가진 상들은 은이 아니고 현상과정에서 착색(발색)된 감광층들입니다. 컬러현상과정에서는 색소만 남기고 모든 은성분을 포함한 유제가 말끔히 제거되기때문에 흑백필름을 컬러 과정으로 현상하면 투명한 베이스만 남아 아무 상도 나오지 않습니다.